# 《어떻게 해야 했을까》와 일본 가족의 치료 결정: 1983년부터 2008년까지 후지노 도모아키(藤野知明)의 다큐멘터리 《どうすればよかったか?》는 조현병이 의심되는 누나를 수십 년 동안 정식 정신과 치료에서 멀리 둔 가족의 기록이다. 작품이 일본에서 크게 반향을 일으킨 이유는 단순히 정신질환의 충격적 사례를 보여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의사인 부모가 왜 치료를 거부했는가, 당시 일본 정신병원에 대한 불신은 얼마나 합리적이었는가, 성인이 된 남동생은 부모를 거슬러 누나를 치료시킬 수 있었는가라는 질문이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판단할 때는 세 가지를 분리해야 한다. 첫째는 장기 정신병원 수용을 피하려는 판단, 둘째는 정신과 진료 자체를 끊는 판단, 셋째는 가족 안에서 누가 성인 환자의 치료 결정에 개입할 권한과 책임을 가졌는가이다. 첫째에는 1980년대 일본 정신의료의 현실이 강한 정상참작 사유가 되지만, 둘째와 셋째는 같은 방식으로 정당화되지 않는다. ## 일본에서 미니시어터발 사회현상이 된 이유 이 작품은 2023년 야마가타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소개된 뒤 2024년 12월 일본에서 정식 개봉했다. 초기에는 네 개 극장에서 시작했지만 미니시어터의 연속 매진과 입소문을 거치며 전국 145개관 수준으로 상영이 확대되었다. 2025년 3월에는 관객 약 12만 명, 흥행수입 약 1억8천만 엔이 언급되었고, 이후 흥행수입이 2억3천만 엔 이상으로 늘었다는 보도도 나왔다. 개인 제작에 가까운 장편 다큐멘터리로서는 이례적인 확산이었다. 반응의 중심도 단순한 “조현병 영화”에서 점차 “가족 영화”로 이동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아무리 말해도 통하지 않는 문제, 가족 모두가 알면서도 말하지 않는 문제, 한 번 내린 결정을 수십 년 동안 수정하지 못하는 문제에 관객이 자신의 경험을 겹쳐 읽었다. 정신질환 당사자·가족, 복지 관계자의 반응도 강했고, 감독은 사인회에서 만난 관객 가운데 상당수가 이런 경험과 직업적 배경을 가졌다고 회고했다. 작품의 질문형 제목은 이 확장을 강화한다. “어떻게 해야 했을까?”는 정답을 선언하는 문장이 아니라 이미 지나간 시간을 다시 심사하게 만드는 과거형 질문이다. 조현병뿐 아니라 치매, 히키코모리, 중독, 장애, 가족 단절처럼 전혀 다른 문제도 같은 문장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 ## 부모는 어느 정도의 의사였는가 부모는 단순히 의사면허만 가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생리학 연구자였고, 어머니는 약리학 연구자로 대학 교수 경력과 의학 교과서 집필 경력이 있었다고 감독은 후속 인터뷰에서 설명했다. 아버지는 정년퇴직 뒤 훈장을 받은 경력도 언급된다. 그러나 두 사람은 정신과 임상의가 아니었다. 생리학과 약리학에 관한 전문성은 정신증 환자의 장기 진단·치료 경험과 같지 않다. 오히려 이 가족의 비극을 설명할 때 중요한 것은 전문지식의 부재보다 전문지식이 주는 자기확신일 수 있다. 일반 부모라면 “우리가 모르니 전문가를 찾자”고 물러날 지점에서, 의학 연구자인 부모는 “우리가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할 여지가 더 컸다. 이 구분은 부모의 선택을 평가하는 데 핵심적이다. “의사였으니 당시 정신의료를 누구보다 잘 알았을 것”이라고 단정하는 것도, “정신과 전문의가 아니니 일반인과 다를 것이 없었다”고 보는 것도 모두 지나치게 단순하다. ## 1983년의 출발점: 이미 정신과에 갔다가 치료 연결이 끊겼다 누나는 1983년 24세 무렵 심한 증상을 보였고 구급차로 정신과에 이송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 가족이 “정신과에 가야 할지 몰랐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미 의료기관에 연결된 상태에서, 단신부임 중이던 아버지가 다음 날 와서 “문제가 없다”는 취지로 누나를 데리고 나왔고 이후 지속적인 정신과 진료가 이어지지 않았다. 이때 남동생은 고등학생이었다. 따라서 1983년의 첫 결정에 관해 동생에게 실질적인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 가족 안의 권위는 의사인 부모에게 있었고, 법적으로도 미성년자인 동생이 성인 누나의 치료결정을 대신할 위치가 아니었다. 당시 일본 정신병원에 대한 공포에는 객관적 근거가 있었다. 장기입원과 폐쇄병동 의존도가 높았고, 이듬해 우쓰노미야 병원 사건이 폭발하면서 폭행, 인력부족, 무자격 의료, 불필요한 장기입원과 감독 실패가 확인되었다. 따라서 “딸을 정신병원에 장기간 맡기고 싶지 않다”는 판단 자체는 시대적 조건 안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장기수용을 피한다”와 “정신과 진료를 끊는다”는 전혀 다른 명제다. 1983년에도 항정신병약은 이미 수십 년째 사용되고 있었고, 외래진료와 다른 전문의의 의견, 상태 관찰과 단기입원 같은 중간 선택지가 존재했다. 당시 약물의 부작용이 크고 정신병원의 인권 상황이 나빴다는 사실은 치료 전체를 포기해야 한다는 결론까지 자동으로 뒷받침하지 않는다. ## 부모가 실제로 내세운 이유와 사후의 해석 후속 인터뷰와 책에서 감독은 말년의 아버지에게 당시 판단의 이유를 직접 물었다고 설명한다. 정신과 치료 자체를 신뢰하지 않았던 것인지, 정신병원에서 학대받을까 두려웠던 것인지 묻자 아버지는 둘 다 아니라고 답했다. 정신분열병이라는 낙인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은 어머니 쪽이 더 강했다고 아버지가 말했다는 회고도 있다. 이 진술은 “당시 정신병원이 너무 끔찍했기 때문에 아버지가 합리적으로 병원을 피했다”는 사후적 변호를 단순화한다. 당시 정신의료의 열악함은 객관적인 배경이었지만, 정작 아버지 자신은 그것을 주된 이유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독은 아버지가 누나의 음료에 향정신성 약물을 몰래 섞어 먹였다고 회고하기도 한다. 이 증언이 맞다면 부모가 정신질환 가능성을 전혀 믿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공식 진단과 병력, 정신과 체계에 들어가는 것은 피하면서 자신들이 집에서 관리하고 약물까지 통제하려 했을 가능성이 생긴다. 따라서 이 가족의 선택은 단순한 무지보다 **낙인 회피, 전문가적 자기확신, 가족 내부 통제, 최초 판단을 수정하지 못하는 경직성**이 결합한 문제로 읽는 편이 설명력이 높다. ## 치료 판단을 시간축으로 다시 채점하기 다음 점수는 의학적 공식 평가가 아니라, 각 시점에 이용 가능했던 선택지와 당시의 사회적 조건을 함께 놓고 보는 편집적 사고실험이다. 100점은 당시 기준에서도 상당히 합리적인 선택, 50점은 이해는 되지만 위험한 선택, 0점은 당시에도 거의 방어하기 어려운 선택을 뜻한다. ### 1983년: 장기입원 회피는 75점, 정신과 단절은 20점 우쓰노미야 사건이 터지기 직전의 일본 정신병원은 실제로 장기수용과 폐쇄성을 걱정할 만한 환경이었다. 따라서 “일단 집으로 데려와 장기입원을 피한다”는 결정에는 상당한 정상참작이 가능하다. 반면 지속적인 정신과 진료 자체를 끊은 선택은 당시 기준에서도 낮게 평가해야 한다. 이미 한 번 의료기관에 연결되었고 항정신병약도 존재했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선택은 “장기수용은 피하되 정신과와의 관계는 유지한다”에 가까웠다. ### 1987~1988년: 제도개혁 뒤에는 시대 탓의 여지가 급격히 줄어든다 우쓰노미야 사건과 국제적 비판 뒤 일본은 정신위생법을 정신보건법으로 개정했다. 임의입원, 정신의료심사회, 정신보건지정의, 퇴원·처우 심사 등 환자권리를 강화하는 장치가 들어갔다. 삿포로에서도 1987년 데이케어 센터가 개설되는 등 지역사회에서 치료와 재활을 이어가는 선택지가 확대됐다. 이 시점부터 “정신과에 가면 곧바로 장기수용된다”는 오래된 공포만으로 모든 진료를 거부하기는 더 어려워진다. 제도개혁이 현실의 병원을 즉시 바꾸지는 못했지만, 부모에게는 최초 판단을 다시 시험해볼 충분한 이유가 생겼다. ### 1992년: 가족치료 제안을 거부한 지점이 개인사적 마감선이다 감독은 대학 상담실에서 가족 문제를 상담했고, 전문가가 가족치료를 제안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이를 거부했다. 이 제안은 누나를 정신병원에 장기입원시키자는 것도 아니었다. 가족 전체가 함께 외부 전문가에게 문제를 열어보자는 낮은 문턱의 개입이었다. 따라서 1992년은 이 가족에게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다. 이때부터 문제는 “정신병원에 대한 공포”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워지고, **가족 문제에 외부가 개입하는 것 자체를 거부하는 구조**가 전면에 드러난다. ### 1996년: 아무리 늦어도 이때는 다른 치료를 시험했어야 했다 2008년 누나에게 효과를 보인 비정형 항정신병약과 같은 세대의 약물이 일본에서 1990년대 중반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감독은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적어도 1996년 무렵에는 새로운 약물치료를 시도할 기회가 있었다고 회고한다. 발병 뒤 13년이 지났는데도 부모의 자가관리 방식으로 회복되지 않았다면, 의학 연구자의 태도라면 기존 가설을 수정하고 다른 방법을 시험했어야 한다. 1996년은 “당시 약이 너무 거칠고 병원이 두려웠다”는 1983년식 변명이 사실상 최종적으로 힘을 잃는 시점으로 볼 수 있다. ### 2002년: 병명과 치료 패러다임까지 바뀌었다 일본정신신경학회는 2002년 “정신분열병(精神分裂病)”이라는 명칭을 “통합실조증(統合失調症)”으로 바꾸었다. 명칭 변경은 단순한 용어 교체가 아니라 낙인과 비관적 질병관을 완화하려는 움직임이었다. 약물치료와 심리사회적 치료, 사회참여와 회복을 함께 보는 관점도 강화됐다. 부모가 1983년에 두려워했을 법한 “정신분열병 환자가 되어 평생 정신병원에 갇힌다”는 사회적 상상은 2002년에는 제도와 전문담론 양쪽에서 상당히 변화해 있었다. 그럼에도 치료를 계속 거부했다면 시대적 정상참작은 거의 남지 않는다. ### 2008년: 실제 치료 반응이 앞선 선택을 역으로 비춘다 누나는 2008년 마침내 입원치료를 받았고 약물치료 뒤 대화와 가사 등 일상 기능이 의미 있게 호전되었다고 감독은 설명한다. 이것만으로 “1983년에 치료했으면 완전히 회복했을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조현병의 경과는 개인차가 크고, 2008년에 사용한 약과 1983년에 쓸 수 있던 약도 같지 않다. 그러나 25년 동안 치료를 피한 판단이 “치료해도 소용없다”는 의미에서 옳았다고 보기도 어렵다. 적어도 치료 가능성을 반복해서 시험했어야 했다는 판단에는 강한 근거가 생긴다. ## 왜 남동생이 부모를 뿌리치고 누나를 데려가지 못했는가 한국 관객은 종종 “성인이 된 남동생이라면 부모를 무시하고라도 누나를 병원에 데려가야 하지 않았나”라고 묻는다. 이 질문에는 법적 권한, 가족문화, 실제 생활조건이 섞여 있다. 1983년 동생은 고등학생이었고 당시 일본의 성년은 만 20세였다. 구 정신위생법 아래에서는 미성년자가 정신장애인의 보호의무자가 될 수도 없었다. 따라서 최초 발병 시점에 동생이 부모와 동등한 결정권을 가졌다고 보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성인이 된 뒤에도 형제라는 이유만으로 자동적으로 성인 누나의 입원동의권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법은 후견인, 배우자, 친권자, 가정재판소가 선정한 부양의무자 등 특정한 순서를 통해 보호의무자를 정했다. 부모와 형제가 함께 존재한다고 해서 모두가 동시에 같은 법적 권한을 갖는 구조가 아니었다. 성인 누나가 병원에 가기를 거부한다면 남동생에게 임의로 붙잡아 차에 태우고 입원시킬 일반적인 권한도 없다. 병원에 데려가더라도 의사인 부모가 “병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상황에서 동생의 주장만으로 장기 비자의 입원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감독 자신도 후속 인터뷰에서 부모가 대리동의를 하는 위치였고 자신이 누나를 갑자기 입원시키기 어려웠으며, 억지로 데려가도 부모가 다시 데리고 나왔을 가능성을 설명했다. 2008년에는 부모가 고령해진 뒤 동생이 실제로 입원 동의의 역할을 맡게 된다. ## 그렇다고 동생에게 아무 우회로도 없었던 것은 아니다 “동생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라고까지 말하면 지나치다. 당시 정신위생법에는 정신장애가 의심되는 사람을 아는 사람이 도도부현 지사에게 진찰과 필요한 보호를 신청하는 행정 경로가 있었다. 자해·타해 위험이 높으면 가족동의와 별개로 조치입원 절차가 가능했고, 보호의무자가 직무를 수행하지 않는 경우 가정재판소에 문제를 제기할 여지도 있었다. 따라서 성인이 된 뒤 동생이 부모와 전면전을 각오했다면 보건소, 정신보건센터, 행정, 가정재판소 같은 가족 바깥의 기관을 끌어들이는 길은 존재했다. 그러나 이것은 “성인 남동생이므로 자연스럽게 가진 가족 내 권한”과는 다르다. 부모와의 관계를 사실상 깨뜨리고, 장거리 생활과 직업까지 조정하면서 국가기관을 가족 안으로 끌어들여야 하는 공격적인 선택이었다. 1990년대 이후까지 상황이 계속 악화됐다는 점을 생각하면 동생에게도 “외부 제3자를 더 적극적으로 끌어들였어야 하지 않았는가”라는 비판은 가능하다. 다만 부모와 동생의 책임을 같은 수준에 놓기는 어렵다. 부모는 누나의 생활을 실제로 통제했고, 병원에서 데리고 나온 당사자였으며, 의사라는 권위를 바탕으로 외부 치료를 막았다. 동생은 그 권력구조의 하위자였다. ## 한국과 일본의 가족 개입 문화는 어떻게 다른가 “일본은 개인주의, 한국은 가족주의”라는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지나치게 거칠다. 그러나 성인 자녀와 부모·형제 사이의 개입 기대가 한일에서 다르게 형성되어 왔다는 비교자료는 있다. 1991년 일본·한국·대만 대학생 비교에서는 늙은 부모를 “무슨 일이 있어도 부양한다”는 응답이 일본 41.8%, 한국 63.5%로 제시되었고, “자기 생활능력 범위에서 한다”는 응답은 일본 56.4%, 한국 35.9%였다. 결혼 뒤 부모와 함께 살 의향을 묻는 외아들·장남 집단에서도 일본 64.4%, 한국 96.6%라는 차이가 제시됐다. 이 수치를 오늘날 전체 사회에 그대로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당시 세대의 가족책임 기대가 달랐음을 보여주는 자료다. 후대의 동아시아 비교연구에서도 성인 자녀가 부모에게 제공하는 지원은 한국과 중국에서 일본보다 강하게 나타나고, 일본에서는 부모가 성인 자녀에게 제공하는 지원의 상대적 비중이 더 큰 경향이 보고됐다. 가족의 범위를 누구까지 느끼는지를 비교한 연구에서도 일본 응답자가 혈연 자체보다 실제 친밀성에 따라 가족 경계를 더 좁게 설정하는 양상이 언급됐다. 이 차이는 “일본에서는 형제가 서로 무관하다”는 뜻이 아니다. 일본 민법도 직계혈족과 형제자매의 부양의무를 규정해 왔다. 오히려 일본의 정신의료제도는 한때 특정 가족을 보호의무자로 지정해 치료와 입원 책임을 집중시켰고, 이 가족 부담이 지나치다는 비판 끝에 보호자 제도가 2014년 폐지되었다. 따라서 일본식 구조를 이해하는 데는 **가족 책임의 부재보다 책임의 분절과 담당자화**라는 표현이 더 정확하다. 가족 전체가 서로의 생활에 자유롭게 개입한다기보다 “이 사람을 실제로 책임지는 가족이 누구인가”가 정해지고, 다른 가족이 그 관계를 넘어서는 데 높은 문턱이 생길 수 있다. ## “각 관계에는 주인이 있다”는 해석 이 작품의 가족을 한국식 가족주의와 비교하면 역설이 보인다. 부모는 누나에게 거의 과도할 정도로 개입한다. 현관을 잠그고 생활을 통제하며 약물까지 자신들이 관리한다. 그러면서 남동생이 부모와 누나 사이의 관계에 개입하는 것은 막힌다. 이를 단순한 개인주의라기보다 **“각 관계에는 주인이 있다”는 가족 내 경계**로 해석할 수 있다. 부모는 “딸은 우리가 책임진다”고 생각하고, 동생은 그 판단이 틀렸다고 보면서도 부모-딸 관계를 강제로 탈취할 자연스러운 권한을 얻지 못한다. 한국의 가족문화에서는 아버지가 잘못하면 성인 자녀가 말리고, 형제들이 모여 부모를 설득하며, 필요하면 친척까지 끌어들이는 집단적 개입이 상대적으로 자연스럽게 상상된다. 그래서 한국 관객에게는 “왜 성인 남동생이 집안의 통제권을 빼앗지 않았는가”라는 질문이 쉽게 나온다. 그러나 이 가족의 일본적 맥락에서 더 정확한 비극은 “가족이 개입하지 않았다”가 아니다. **이미 부모가 너무 강하게 개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가족이 개입하기 어려웠다.** ## 책임의 비대칭과 최종 평가 부모의 가장 큰 잘못은 1983년에 한 번 틀린 판단을 내렸다는 사실만이 아니다. 당시 일본 정신병원에 대한 불신과 낙인은 실제였고, 처음 며칠의 판단에는 정상참작할 요소가 있다. 더 큰 문제는 1984년 우쓰노미야 사건, 1987~1988년 법 개정, 1992년 가족치료 제안, 1990년대 중반의 새로운 약물, 2002년 병명과 치료 패러다임의 변화처럼 **새로운 정보와 선택지가 계속 들어왔는데도 최초 판단을 거의 업데이트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연구자의 언어로 바꾸면 더 선명하다. “집에서 우리가 관리하면 된다”는 가설이 10년, 15년, 20년 동안 실패하는데도 가설을 폐기하지 않았다. 전문지식이 합리성을 보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판단을 고착시키는 권위로 작동했을 가능성이 있다. 동생의 책임은 그보다 약하다. 성인이 된 뒤 외부기관을 끌어들이는 더 적극적인 개입이 가능했을 수 있고, 특히 1990년대 이후에는 “부모가 반대해서 아무것도 못 했다”는 설명만으로 완전히 면책되기는 어렵다. 그러나 초기 결정권과 실제 통제력을 가진 사람, 의료접근을 차단한 사람, 의사라는 권위를 가진 사람은 부모였다. 따라서 가장 균형 잡힌 판정은 다음과 같다. - 1983년 장기입원을 피하려 한 판단은 당시 기준에서 상당 부분 이해 가능하다. - 1983년부터 정신과 진료까지 끊은 판단은 이미 위험했다. - 1987~1988년 이후에는 제도 변화 때문에 시대적 정상참작이 빠르게 줄어든다. - 1992년 가족치료를 거부한 시점은 가족사적으로 결정적인 기회 상실이다. - 1996년 무렵에는 아무리 보수적으로 보아도 다른 치료를 시험했어야 한다. - 2002년 이후까지 같은 판단을 유지한 것은 거의 변호하기 어렵다. - 남동생은 부모와 같은 수준의 책임자가 아니지만, 성인기 이후 더 적극적인 제3자 개입을 시도할 여지는 있었다. ## 검토 상태와 참고 자료 이 문서는 작품의 일본 내 반응, 감독의 후속 인터뷰와 책에서 드러난 가족사, 일본 정신의료 제도, 한일 가족책임 비교를 한 시간축에 통합한 원고다. 세부 흥행수치, 가족의 경력, 약물명, 법조문 적용과 조사 수치는 외부 재검증이 필요하다. 특히 2008년에 누나에게 효과가 있었던 약의 정확한 이름은 공개 인터뷰에서 명확히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특정 약으로 단정하지 않는다. 참고로 사용된 자료는 야마가타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소개, 문예춘추·CREA·문춘온라인의 감독 인터뷰와 책 소개, 일본정신신경학회의 통합실조증 명칭변경 자료, 후생노동성의 정신보건법·지역정신보건 자료, 한일 가족책임 비교 연구 등이다. - [야마가타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작품 소개](https://www.yidff.jp/2023/pj/23pj02.html) - [CREA 감독 인터뷰](https://crea.bunshun.jp/articles/57712) - [문춘온라인 후속 인터뷰](https://bunshun.jp/articles/-/87182) - [문춘 BOOKS 후속 자료](https://books.bunshun.jp/articles/-/10702) - [일본정신신경학회 통합실조증 명칭 변경 자료](https://www.jspn.or.jp/modules/advocacy/index.php?content_id=58) - [후생노동성 정신보건 관련 법령·자료](https://www.mhlw.go.jp/) - [일본·한국·대만 대학생의 부모부양의식 비교](https://www.jstage.jst.go.jp/article/jhej1987/42/4/42_4_305/_pdf/-char/ja) - [동아시아 가족지원 비교 연구](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9009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