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은 부채이지만 왜 곧장 약탈이 되지 않는가: 『왜 그들만 부자가 되는가』의 화폐론 비평 은행은 돈을 창조한다. 새로 생긴 돈은 누구에게나 동시에 도착하지 않는다. 화폐를 발행하거나 대출을 공급하는 제도는 소득과 자산의 분포를 바꿀 수 있다. 모두 논의할 만한 명제다. 그러나 **맞는 회계 설명과 올바른 역사적 결론은 서로 다른 것**이다. 전자를 인정하는 사람도 후자가 은행의 본질적 약탈, 복지국가의 필연적 실패, 금본위의 우월성을 입증한다는 결론에는 동의하지 않을 수 있다. 필립 바구스와 안드레아스 마르크바르트의 『왜 그들만 부자가 되는가』는 이 균열을 드러내는 좋은 사례다. 독일어권 오스트리아학파의 문제의식을 토대로 국가의 화폐 독점, 신용팽창, 인플레이션과 불평등을 연결한다. 원서는 2014년 독일에서 발간된 대중 경제서로, 한국어 개정판은 2025년에 출간된 것으로 소개되었다. 학술적 전면 조사나 원문 대조에 기초한 주석서는 아니며, 여기서는 책에 귀속된 논지와 그것을 둘러싼 반론을 분리해 검토한다. 특히 역사적 사례는 [로마·산업혁명·금본위의 서사 비판](./roman-industry-gold-standard-history.md)에서 따로 다룬다. ## 좋은 질문과 지나치게 쉬운 답 핵심 질문은 명료하다. 화폐 공급이 늘어날 때 누가 먼저 이익을 얻는가? 자산 가격이 오르는 동안 임금과 생활비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중앙은행과 상업은행은 어떤 권한을 통해 경제의 미래 구매력을 현재로 앞당기는가? 금리와 유동성에 대한 접근은 왜 계층마다 다른가? 이 질문은 정통 금융이 숨긴 비밀이 아니다. 신용과 금융중개, 통화정책의 분배 효과는 중앙은행과 경제학의 공개적인 연구 대상이다. 문제는 질문에 하나의 대답만을 남기는 방식이다. 예컨대 ‘돈이 중립적으로 퍼지지 않는다’는 관찰은 곧 ‘돈을 먼저 받는 사람만 언제나 승리한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은행의 대출은 예금을 창출한다’는 회계 사실은 ‘은행이 창출액 전부를 아무 위험 없이 취한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 ‘금본위 아래 화폐 발행을 제약할 수 있다’는 말은 ‘금본위라면 어떤 불황도 더 잘 이겨 낸다’는 뜻이 아니다. 금융제도를 비판할 때는 적어도 **회계적 사실, 행동의 유인, 실제 분배 효과, 제도의 윤리적 평가**를 네 단계로 구별해야 한다. 사실에서 판단으로 옮겨가는 모든 단계에는 추가적인 근거가 필요하다. ## 세뇨리지와 은행 신용창조는 같은 수익이 아니다 세뇨리지는 화폐 발행자가 화폐 발행을 통해 얻는 경제적 이익이다. 전통적으로는 주화의 명목가치와 제조·발행 비용의 차이를 떠올릴 수 있다. 현대 중앙은행의 경우 지폐와 중앙은행 부채를 발행하고 이자가 붙는 자산을 보유하는 데서 생기는 수익이 중요한 설명 경로다. 그 수익에는 운영비와 이자지급 비용, 보유자산의 손실 가능성도 결부된다. 반면 상업은행이 대출로 예금통화를 창출하는 일은 중앙은행이 지폐를 발행하는 것과 제도적으로 다르다. 두 경우가 모두 화폐의 공급을 바꾸기는 하지만 **‘예금이 새로 생긴다’는 사실과 ‘발행이익을 누가 얼마 가져간다’는 질문을 하나로 합치면 안 된다.** 상업은행은 대출에서 이자를 얻을 가능성이 있는 동시에 대출채권의 부실과 예금 지급 의무를 부담한다. 세뇨리지 수익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특정 부유층의 순이익이 그만큼 증가했다고 산출할 수도 없다. 중앙은행 수익이 정부에 이전되는 제도, 중앙은행의 보유자산 손익, 지급준비금 이자, 재정의 지출 경로를 함께 따져야 한다. 독일 분데스방크가 2024년 약 191억 유로의 손실을 기록했다는 사례는 중앙은행이 언제나 고정된 순이익을 얻는 기계가 아니라는 반례로 제시될 수 있다. 물론 **어느 해의 적자가 화폐 발행의 제도적 특권이나 장기적 분배 효과가 없다는 증거는 아니다.** 반례가 반박하는 것은 ‘언제나 손쉬운 이익’이라는 무조건적 명제다. 관련하여 [유럽중앙은행의 세뇨리지 설명](https://www.ecb.europa.eu/ecb-and-you/explainers/tell-me/html/seigniorage.en.html)과 [분데스방크 자료](https://www.bundesbank.de/en/tasks/topics/how-money-is-created-667392)는 구분에 필요한 출발점이다. ## 신용은 부채다: 은행의 장부를 펴면 보이는 것 ‘신용은 부채’라는 명제는 우선 회계적 관계를 지시한다. 한 사람의 예금자산은 은행의 예금부채이고, 한 사람의 대출부채는 은행의 대출자산이다. 예금이 창출되는 장면을 단순화하면 다음과 같다. 1. 은행이 차입자에게 100의 대출을 승인한다. 2. 은행 장부에는 **대출자산 +100**, **예금부채 +100**이 동시에 기록된다. 3. 차입자 장부에는 **예금자산 +100**, **대출부채 +100**이 기록된다. 4. 차입자가 그 돈을 다른 은행의 고객에게 보내면, 은행 간 결제와 유동성 조달 문제가 실제로 발생한다. 5. 원금이 상환되면 해당 대출자산과 예금부채가 줄어드는 방향으로 작용한다. 이 장면에서 은행은 사전에 다른 고객이 예금한 동일한 100을 봉투째 빼내어 건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은행이 100을 자기 순자산으로 획득하는 것도 아니다. **같은 숫자가 자산과 부채의 양쪽에 생긴다.** 이후 은행은 자기자본·유동성·규제, 대손 위험, 차입자의 상환 능력, 수익성을 고려해야 한다. 예금의 이체와 결제에 필요한 중앙은행 화폐도 중요하다. 따라서 ‘은행이 대출을 통해 돈을 만든다’는 지적을 반박하기 위해 은행이 오직 기존 저축만 대출한다고 설명하는 것 역시 잘못이다. 영란은행의 2014년 해설은 현대 경제에서 상업은행의 대출이 예금통화를 만든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독일 분데스방크와 BIS 자료에서도 신용 창조와 그 제약을 함께 설명한다. 은행을 둘러싼 논쟁은 **화폐 창출 여부**가 아니라 **화폐 창출의 조건과 그 대가가 어떻게 배분되는가**로 이동해야 한다. ‘모든 화폐는 부채다’라는 표현도 무조건적으로 확대하지 않는다. 어떤 화폐를 어떤 회계 단위와 제도로 정의하는지부터 지정해야 한다. 은행예금의 부채 성격을 설명하는 것은 유용하지만, 경제 전체의 모든 부가 부채로만 이루어졌다는 주장이나 모든 교환이 허구라는 철학적 결론은 별도의 논증이 필요하다. ## 칸티용 효과: 먼저 받은 사람의 이익은 어디까지인가 새 돈이 공급될 때 모든 상품가격과 임금이 같은 순간 같은 비율로 변하지 않는다는 통찰은 중요하다. 이른바 칸티용 효과는 화폐의 진입 경로가 상대가격과 소득의 분포를 바꿀 수 있다는 문제를 부각한다. 금융시장에 먼저 들어간 유동성은 자산가격에, 정부 조달에 들어간 자금은 특정 산업과 고용에, 가계 이전으로 들어간 자금은 소비와 생활에 다른 경로로 영향을 준다. 그러나 **화폐의 최초 수취인과 최종 승자를 같다고 놓을 수는 없다.** 금리 인하가 자산가격을 높이는 국면에는 자산 보유자의 이익이 클 수 있지만, 다른 국면에는 실업을 줄이고 저소득층 고용을 유지하는 효과가 중요할 수 있다. 임금·물가의 조정 시차, 변동금리와 고정금리 부채, 자산 보유의 구성, 경기의 시작 조건에 따라 손익이 바뀐다. 통화완화가 불평등에 미치는 효과를 한 방향으로 고정하는 것은 그 자체로 추가 검증이 필요한 실증 주장이다. 이 논점은 두 극단을 함께 경계한다. ‘화폐는 중립적이므로 계층 차이는 없다’는 설명은 분배 경로를 지운다. 반대로 ‘통화가 풀리면 부자는 반드시 이기고 노동자는 반드시 진다’는 설명도 고용과 부채 부담, 정책 대상, 시간차를 지운다. [ECB의 통화정책·분배 논의](https://www.ecb.europa.eu/pub/pdf/scpdps/ecb.dp6~5333e9ef76.en.pdf)는 그 복수 경로를 살피는 자료로 언급되었다. ## 생산적 신용, 자산투기 신용, 연명 신용을 분리한다 부채는 미래의 수입을 현재로 당겨 쓴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경제적 역할은 같지 않다. - **생산적 신용:** 새로운 생산설비와 기술, 주택 건설, 교육 등 미래 생산능력이나 생활의 사용가치를 형성하는 자금 조달. 다만 투자 실패와 과잉 공급의 가능성도 있다. - **투기적 신용:** 기존 토지·부동산·금융자산의 가격 상승을 기대하여 차입을 늘리는 방식. 실물의 공급 능력과 자산가격의 상승이 분리될 수 있다. - **연명 신용:** 상환능력이 무너진 활동을 손실 인식 없이 계속 굴리는 대출. 즉각적인 붕괴를 완충하는 효과도 있을 수 있으나 장기 생산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 이들은 현실에서 서로 섞일 수 있다. 공장 설비대출도 잘못 쓰이면 과잉투자가 되고, 주택대출은 새 주택의 공급을 촉진하기도 하며 기존 주택의 가격을 떠받치기도 한다. 그래서 평가 기준은 ‘대출이라는 형식’이 아니라 **무엇을 생산했는가, 누가 위험을 졌는가, 실패를 누가 부담했는가**가 되어야 한다. ‘신용은 부채이므로 허구다’라는 주장은 신용을 통해 실제 공장과 서비스가 생길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하지 못한다. 반대로 ‘신용이 성장에 필요하므로 금융팽창은 좋다’는 주장도 자산거품을 설명하지 못한다. 생산적 신용과 약탈적 신용은 경계가 자동으로 정해지지 않는 분석 대상이다. ## 화폐원인론이 불평등의 다른 기제를 지울 때 국가와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은행의 대출권한은 분배에 영향을 준다. 그렇지만 부를 가진 사람에게 유리한 제도가 **오직** 화폐제도 하나라는 뜻은 아니다. 상속, 토지와 주택 공급의 제약, 독점과 시장집중, 노동자의 교섭력, 세제, 교육 기회, 세계적 생산망과 기술 변화도 소득과 자산의 집중을 낳는 별도의 경로다. 단일 원인론에는 묘한 매력이 있다. 모든 경제적 불만을 한 회계 원리로 설명하고 모든 역사적 사건을 그 원리의 증거로 다시 배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명이 너무 많은 것을 동시에 설명한다면 오히려 반증하기 어려워진다. 비교해야 할 것은 ‘돈이 언제나 문제였는가’가 아니라, **다른 조건들이 있을 때 통화제도 하나를 바꾸면 결과가 얼마나 달라지는가**이다. 이 점은 윤리적 평가를 지우지 않는다. 중앙은행의 구제 결정이 특정 금융기관에 유리했는지, 금융권의 손실이 공공부문으로 이전되었는지, 담보와 자산이 없는 사람이 불리한 조건으로 차입하는지는 제도 비판의 구체적 대상이다. 다만 비난할 구체적 거래를 특정하는 일이 ‘은행 전체가 무에서 가치를 훔친다’는 선언보다 더 많은 사실을 요구한다. ## 경제학자들은 침묵했는가: 독일과 스위스의 공개 논쟁 저자들이 활동한 독일어권에서도 상업은행의 화폐창조에 대한 설명이 공론장 밖의 금기가 된 것은 아니다. 분데스방크는 2017년 은행이 대출 과정에서 장부화폐를 창출한다고 직접 설명하면서, 그 창조가 무제한이 아니고 여러 제약에 묶인다는 점을 덧붙였다. 영란은행 역시 공개적으로 같은 핵심 원리를 설명한다. **은행이 돈을 만든다는 것 자체를 학계가 숨기고 있다**는 인상은 이러한 문서의 존재만으로 약해진다. 스위스에서는 2018년 ‘Vollgeld’, 즉 주권화폐 개혁안이 국민투표에 부쳐졌다. 이 제안은 예금통화 창출을 상업은행에서 중앙은행 쪽으로 옮기는 급진적인 제도 변경을 겨냥했다. 반대가 약 75.7%였다는 결과도 제시되었다. 이것이 곧 어느 한 학설의 진위를 국민투표가 판정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반대 표에는 은행 안정성, 제도 전환 비용, 정책 수단, 기존 금융의 문제를 고치는 방법에 대한 서로 다른 판단이 들어 있을 수 있다. 스위스의 논쟁과 독일 중앙은행의 설명은 **이 책 자체에 대한 서평이나 직접 반박문이 아니다.** 다만 책이 제기하는 문제군이 이미 경제학자, 중앙은행, 시민과 정치권 사이의 공개 논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판이 없었다기보다, ‘은행이 예금을 만든다’는 사실을 인정한 다음 그것이 왜 곧장 특정 화폐개혁을 강제하지는 않는지를 다투었던 셈이다. 100% 지급준비, 중앙은행의 독점적 통화창출, 자유은행론, 금본위론은 서로 같은 해결책도 아니다. ## 금본위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가 국가가 화폐의 공급을 재량적으로 늘리는 데 제한을 두자는 주장은 장기적인 규율과 신뢰의 필요를 환기한다. 그러나 경직된 화폐 공급이 고용·은행 지급능력·명목부채와 충돌할 때의 비용을 함께 계산해야 한다. 디플레이션으로 상품가격과 소득이 하락해도 대출계약의 원금이 명목상 그대로라면 차입자의 실질 부담은 증가한다. 은행런과 유동성 위기 앞에서 최종대부자와 재정의 완충 기능이 왜 필요한지도 질문해야 한다. 대공황 때 여러 나라가 금본위를 이탈한 순서와 회복 경로를 단순한 ‘화폐 타락’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는 [로마·산업혁명·금본위의 서사 비판](./roman-industry-gold-standard-history.md)에 정리한다. 좋은 화폐는 무엇인가. 그 답에는 장기 구매력만이 아니라 **위기 때 결제가 유지되는가, 명목부채가 어떤 가격 변화 속에서 상환될 수 있는가, 충격의 비용이 누구에게 돌아가는가**도 포함되어야 한다. ## 논쟁을 실제로 검증하려면 책의 주장을 평가하기 위한 최소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문제의 화폐는 중앙은행 지폐인가, 지급준비금인가, 상업은행 예금인가? 각각 어느 기관의 자산·부채인가? 2. 어느 금융기관·자산 보유자·임금 계층이 **언제** 수혜를 받았다는 것인가? 구체적인 유동성 공급 경로는 무엇인가? 3. 자산가격 상승과 고용 회복, 물가 상승과 실질부채 경감 중 어느 효과를 확인했는가? 4. 동일한 불평등을 상속·독점·토지제도·임금 교섭력으로 설명하는 가설과 비교했는가? 5. 금본위 또는 대안적 화폐체제가 그 시점의 은행위기와 실업에 어떻게 대응했을 것인가? 그 가정과 기회비용은 무엇인가? 6. 단일한 역사적 사례가 이념 전체의 정당성을 증명한다는 식의 추론을 하고 있지 않은가? 화폐제도를 비판하는 일은 필요하다. 그러나 정확한 회계가 곧 정확한 역사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불편한 사실을 드러낸 것과 그 사실에 유일한 결말을 부여한 것 사이**에 논쟁이 있다. ## 참고 자료와 검증 경계 아래 자료는 기존 논의에 이미 등장한 것만 기록했다. 원서의 해당 쪽수와 직접 인용은 대조하지 못했고, 링크의 현재 유효성·학술 논문의 세부 방법론은 추가 검증하지 않았다. 책의 역사 서술에 관한 구체적 표현은 전달된 요지에 의존하므로 **정확한 문장 귀속은 미검증**으로 남긴다. - [영란은행, Money creation in the modern economy (2014)](https://www.bankofengland.co.uk/quarterly-bulletin/2014/q1/money-creation-in-the-modern-economy) - [독일 분데스방크, How money is created](https://www.bundesbank.de/en/tasks/topics/how-money-is-created-667392) - [유럽중앙은행, What is seigniorage?](https://www.ecb.europa.eu/ecb-and-you/explainers/tell-me/html/seigniorage.en.html) - [유럽중앙은행, Monetary policy and inequality 논의](https://www.ecb.europa.eu/pub/pdf/scpdps/ecb.dp6~5333e9ef76.en.pdf) - [BIS에 수록된 은행 신용·통화창출 설명](https://www.bis.org/review/r180118c.pdf) - [스위스 KOF, Sovereign Money Initiative 논의](https://kof.ethz.ch/en/surveys/experts-surveys/economists-surveys/sovereign-money-initiative.html) - [스위스 주권화폐 국민투표 결과 보도](https://www.reuters.com/article/world/swiss-reject-sovereign-money-initiative-to-radically-alter-bank-lending-idUSKBN1J60P7/) - [『왜 그들만 부자가 되는가』 한국어판 도서정보](https://www.yes24.com/product/goods/1405372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