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뢰즈 이후, 생성·자본·기술을 이어 간 사상가들 들뢰즈 이후에는 한 명의 “정통 후계자”가 나타났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들뢰즈 한 사람 안에서 교차하던 존재론, 정치, 자본주의 분석, 정동, 과학, 기술, 예술의 기능이 여러 연구자에게 분산되었다. 이 분산 자체가 들뢰즈를 하나의 학파나 교리로 만들기 어렵게 한다. 따라서 “제2의 들뢰즈는 없다”는 말은 후계자가 전혀 없다는 뜻보다, 같은 규모와 문체와 분야 횡단성을 한 사람이 다시 갖지 않았다는 평가에 가깝다. ## 마우리치오 라자라토: 통제사회와 빚진 인간 말년 들뢰즈가 던진 “갇힌 인간이 아니라 빚진 인간”이라는 표현을 가장 직접적으로 연구 프로그램으로 발전시킨 인물 가운데 하나가 마우리치오 라자라토다. 『빚진 인간의 탄생』은 부채를 단순한 금융계약이 아니라 미래 행동을 통치하는 관계로 본다. 학자금·주택·국가·기업 부채처럼 미래의 소득과 선택이 현재의 채무관계에 묶이면, 권력은 사람을 물리적으로 가두지 않고도 가능한 행동의 범위를 좁힐 수 있다. 이 점에서 라자라토는 미완성 『마르크스의 위대함』 이후를 상상할 때 가장 직접적인 계승자처럼 보인다. 통제사회에서 몇 문장으로 제시된 문제를 21세기 금융자본주의의 주체 형성 문제로 확장했기 때문이다. ## 하트와 네그리: 제국, 다중, 공통적인 것 안토니오 네그리는 말년 들뢰즈에게 통제사회에서 새로운 공산주의와 집합적 주체가 가능한지를 직접 질문했던 대담 상대다. 이후 마이클 하트와 함께 『제국』, 『다중』, 『공통체』, 『어셈블리』로 이어지는 작업에서 이 질문에 적극적인 답을 제시했다. 이 계열은 생산과 권력이 네트워크화되면 저항 주체도 단일한 대표 주체가 아니라 서로 다른 차이를 유지하면서 협력하는 “다중”이어야 한다고 본다. 들뢰즈가 끝까지 확정하지 않은 “누가 변혁하는가”에 비교적 명확한 답을 써 넣은 셈이다. 동시에 바로 그 지점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 네트워크형 협력과 공통적인 것의 자생적 정치능력에 너무 큰 희망을 거는 것은 아닌가, 차이와 연결의 생산성이 다시 권력과 자본에 포획되는 문제를 충분히 설명하는가가 계속 논쟁거리다. ## 마누엘 데란다: 배치를 사회과학의 언어로 마누엘 데란다는 배치, 강도, 창발, 다양체, 비선형적 역사를 사회·도시·경제·과학에 적용할 수 있는 비교적 체계적인 언어로 바꾼다. 사회를 하나의 전체가 부분을 규정하는 구조로만 보지 않고, 개인·조직·도시·국가처럼 서로 다른 수준의 실제 배치들이 독립성과 관계성을 동시에 가진다고 본다. “헤겔식 전체성과 모순 없이 사회 전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가장 직접적으로 답하는 들뢰즈 계열의 시도 중 하나다. 장점은 분석 도구로 쓰기 쉽다는 것이고, 반대로 들뢰즈의 문학적 개념 발명과 마르크스적 비판의 날이 약해졌다는 평가도 가능하다. ## 브라이언 마수미: 정동과 미디어 정치 브라이언 마수미는 들뢰즈와 가타리의 잠재성, 강도, 정동, 사건을 문화·미디어·정치 분석으로 밀어붙인 인물이다. 『천 개의 고원』 영어 번역자로서 영어권 수용에도 큰 역할을 했다. 정치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명시적으로 무엇을 믿는가만이 아니라 불안, 공포, 흥분, 기대 같은 정동이 어떻게 순환하고 증폭되는가라는 문제다. 이 계열은 현대 미디어와 대중정치에서 이념의 내용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집단적 격앙을 분석하는 데 강하다. ## 로지 브라이도티: 생성에서 포스트휴먼으로 로지 브라이도티는 생성, 유목적 주체, 비인간적인 것과의 관계를 페미니즘과 포스트휴머니즘으로 연결한다. 인간을 완성된 자율적 개인으로 놓기보다 다른 인간, 동물, 환경, 기술과의 관계 속에서 계속 구성되는 존재로 본다. 이 방향은 AI와 생명공학이 인간의 경계를 흔드는 시대에 “인간다움”을 하나의 고정 본질로 방어하는 것과 다른 선택지를 제공한다. ## 이자벨 스텡게르스: 문제를 제대로 구성하는 실천 이자벨 스텡게르스는 들뢰즈의 단순한 해설자가 아니며 화이트헤드, 과학철학, 생태학과 독자적으로 교차한다. 그럼에도 “먼저 보편적 원리를 세우고 현실을 거기에 복속시키기보다 각각의 실천이 제기하는 문제를 그 자리에서 구성한다”는 태도는 들뢰즈와 강하게 공명한다. 특히 과학·정치·생태 문제에서 서로 환원되지 않는 행위자와 실천을 한 이론으로 평탄화하지 않고, 무엇이 실제로 문제를 구성하는지를 느리게 확인하려는 접근이 중요하다. ## 육후이: 디지털 기술과 복수의 미래 육후이는 하이데거, 시몽동, 들뢰즈, 사이버네틱스, 중국철학을 교차시키는 기술철학자다. 단순한 들뢰즈주의자는 아니지만, 통제사회 이후 디지털 기술의 보편화 문제를 현재까지 끌고 온다는 점에서 중요한 먼 후계자다. 코스모테크닉스 개념은 기술을 하나의 보편적 진보 경로로만 보지 않고 서로 다른 문화·우주론·생활방식에 따라 다른 기술적 미래가 가능하다는 문제를 제기한다. AI 시대에는 “AI가 좋은가 나쁜가”보다 어떤 AI가 어떤 세계관과 제도, 노동, 생활양식에 결합하는가를 묻게 한다. 2026년에 소개된 『Kant Machine』 역시 AI 이후의 비판철학, 규범, 기계 문제를 다루는 최신 접점으로 언급되었다. 이 최신 출간 정보는 이번 편집에서 외부 재검증하지 않았다. ## 마테오 파스퀴넬리: 들뢰즈의 직접 후계자는 아니지만 현재로 가는 다리 마테오 파스퀴넬리는 들뢰즈의 직접적인 계승자로 분류하기보다 AI를 노동·자동화·관리의 역사 속에서 읽는 현재적 다리로 보는 편이 낫다. 『The Eye of the Master』는 AI를 인간 지능의 모방이라는 서사만으로 설명하지 않고, 노동을 측정하고 분할하고 조직하고 자동화해 온 역사와 연결한다. 들뢰즈의 개념을 현대 AI에 억지로 늘이는 대신, 2020년대의 물질적 조건을 직접 다루는 연구로 넘어가는 경로가 된다. ## 기능이 분산된 계보 들뢰즈 이후의 계보를 질문별로 나누면 다음과 같이 볼 수 있다. - 통제사회·금융·부채: 라자라토. - 새 정치주체·공산주의: 하트와 네그리. - 배치의 사회존재론: 데란다. - 정동·미디어·정치: 마수미. - 생성·포스트휴먼: 브라이도티. - 과학·생태·문제 구성: 스텡게르스. - 디지털 기술·복수의 기술적 미래: 육후이. - AI·노동·자동화의 물질적 계보: 파스퀴넬리. 이들은 하나의 정통 학파를 이루지 않는다. 오히려 들뢰즈의 여러 기능이 서로 다른 분야로 분화되었다고 보는 편이 적절하다. ## 무엇을 읽을 것인가 『천 개의 고원』을 장기적으로 읽고 있다면 후속 독서는 “누가 가장 들뢰즈와 비슷한가”보다 현재 가진 질문에 따라 고르는 편이 낫다. 자본주의와 통제가 궁금하면 라자라토, 사회이론의 체계화가 궁금하면 데란다, AI와 기술의 미래가 궁금하면 육후이와 파스퀴넬리, 정동과 미디어 정치가 궁금하면 마수미가 더 직접적이다. 이렇게 이동하면 들뢰즈를 계속 해설하는 대신 들뢰즈가 남긴 질문이 다른 이론에서 어떻게 변형되는지를 볼 수 있다. ## 관련 문서 - [들뢰즈: 생성과 새로운 것의 철학](./deleuze-becoming-new.md) - [통제사회, 마르크스, 말년의 미래관](./deleuze-control-marx-future.md) - [현대 세계를 지배하는 철학과 합리성](./contemporary-governing-philosophies.md) ## 검토 상태 인물과 저작에 관한 정보는 현재 접근 가능한 논의에서 이미 언급된 범위를 사용했다. “미완성 『마르크스의 위대함』의 한 장을 대신 쓴 것 같다”는 식의 평가는 계보를 설명하기 위한 해석이며 문자 그대로의 저작 계승을 뜻하지 않는다.